소아마자는 한반도 정세의 변화에 대응해 가장 세력이 강한 신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했는데 이는 신라에 의한 임나의 조공이라는 형태로 결실 맺었다. 일본 측은 신라에게 임나의 조를 공진시킴으로써 신라에게 임나에 대한 일본의 명목상의 옛 주권을 내려 권위를 유지하려는 것이고 신라는 실질적으로 임나 영유를 일본에게서 승인받는다는 이점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큰 의의가 있다. 임나의 조는 단순히 형식상의 조라고 하는 조물 공진에 머무르지 않고 당시의 선진 문물의 이입이라는 점에서 일본에게 큰 가치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한편 물부수옥은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를 복원해 백제에 의한 임나 부흥을 이루면서 선진 문화 이입의 창구를 확보하는 방안을 취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남가라 즉 금관가라의 부흥에 초점을 맞춘 것에 반해 백제는 고령가라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백제에 있어서 임나의 남동부 즉, 신라 영토에 들어간 금관가라 등은 이제 관심이 없고 신라에 대항하기 위한 체제 확보가 급선무로 수옥은 이러한 백제의 계획에 따르지 않았다.
이후 백제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한 물부수옥이 멸망한 후,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개선된 것은 588년에 백제가 사리, 승려, 사찰 공인 등을 일본에 보내면서부터이다. 이는 비조사원 건립과 밀접한 것으로 직접적으로는 백제가 소아씨의 요구에 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