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통천황조에 선광이 백제왕의 칭호를 받은 것은 백제왕으로서의 권위로 인해 백제귀화인을 통솔하는 역할을 선광과 그 자손들에게 인정받은 것을 보여준다.
백제왕씨는 높은 위계를 얻은 것에 반해 参議(참의)이상이 되지 못하고, 지방관으로 임명되는 사람이 많았다. 이것은 백제왕씨가 중앙의 정치적 결정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관동지방의 지방관에 부임하는 것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얻는 행운으로 이어졌다.
백제계 기술자가 활약한 동대사 대불 조영 무렵을 정점으로 백제계 기술의 가치가 저하, 백제계 귀화인에 대한 통솔 필요성도 없어졌다.
桓武朝(환무조)가 들어서고, 환무천황은 그의 어머니의 계보가 백제왕실로부터 나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직계 백제왕족인 백제왕씨를 외척으로 우대했다. 그리고 백제계인 것이 우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백제왕씨를 필두로 백제계 귀화인이 결집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백제왕씨는 백제계 귀화인들의 대표자로서의 권위가 부활했다. 그러나 환무천황조 이후에는 그 권위도 소멸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