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와 왕흥사 건립을 통해 무왕의 권력강화를 살펴본 것이다.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의 분석을 통해 미륵사의 창건 시기는 백제 무왕대였으며 이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달리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의 왕과 신라 진평왕 사이는 대단히 친밀한 관계로 서술된다. 이는 설화 상의 세계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으로 현실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바람이 투영된 것으로 미륵사를 건립한 왕은 진평왕과 같은 시대의 인물인 무왕일 것이다. 미륵사는 귀족세력의 타협 아래 무왕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무왕은 미륵사를 익산에 세워 귀족세력의 반발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인 익산을 수도로 격상시킬 이중의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무왕은 미륵사 건립을 통해 귀족세력과의 타협을 모색한 뒤에는 국왕의 강력한 전제권력을 희망하였고 이에 귀족회의가 갖는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정사암회의가 개최된 호암사에 대응할만한 사찰로 왕흥사를 건립하였다. 왕흥사는 국왕 권위를 신장시키기 위한 사찰로 귀족세력의 심한 반발이 있었고 이는 법왕대 한 차례의 중단과 이로 인한 법왕의 피살 가능성 등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왕흥사는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건립되었다. 국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올리기 위해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고 주위 조경을 화려하게 꾸민 것은 근거리의 호암사를 염두한 것이며 이는 호암사에서 개최된 귀족회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무왕 3년 해수는 아막산성 전투에서 신라에 대패하였다. 그는 이 전투에서 백제의 상비병 6만 가운데 4만을 잃었다. 관산성 전투보다 더 큰 피해였다. 이로 인해 백제는 큰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를 극복하면서 무왕은 귀족세력 견제를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귀족세력과의 타협을 유도하기 위한 미륵사 창건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무왕은 대규모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몇 차례 거두었고 무왕의 권력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한강유역 회복을 기도하였던 무왕 28년 전후로 하여 대성팔족의 활동이 급격히 줄어든다. 이는 무왕의 권력강화가 이루어진 것ㅇ로 해석되며 이때 왕흥사의 공사가 재추진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무왕의 전제권력 강화에도 불구하고 대성팔족의 권한이 상당히 지속되고 있어 무왕의 권력강화의 한계성이 있었다고 하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