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에 기록된 백제 악기에 관한 자료를 검토하고, 최근까지 발굴된 현악기 금에 관한 고고학 자료를 시대순으로 정리하였다.
국내 문헌기록을 검토한 결과 백제도 현악기를 지녔으며, 그것이 제사 의례에 연주되었고, 왕실의 악기로도 애용되었음을 알수 있었다. 한편, 중국문헌에서 백제 악기를 언급할 때 특히 현악기로 ‘공후’와 ‘쟁’이 있는데, 이중에서 ‘쟁’을 기록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백제 현악기 ‘금’이 중국인 입장에서 ‘쟁’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일본문헌의 경우, 백제금에 관한 직접 관련된 기사는 없으나, 467년에 오나라 금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기록은 일본문헌에 나타난 백제악 가운데 ‘군후’를 고구려 거문고가 백제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해석하는 부분을 재고하게 하였다. 아울러 731년 일본에서 백제악은 많은 인원의 악사들이 활동하였는데, 이는 백제의 음악 연주와 악기 사용 등을 짐작케 하였다. 즉, 국내외 문헌에서 백제의 현악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케 하며, 일본에서의 해외음악 활동은 삼국 가운데 가장 활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록은 4점의 고고학 유물로써 확인되었다.
신창동 악기는 마한 지역에도 현악기가 존재했음을 입증해 주고, 유물의 시기가 기원전 100년이라는 현존 최고의 현악기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대전 월평동에서는 ‘양이두’만 출토되었지만, 6세기 백제 현악기의 형태를 짐작케 하는 귀중한 유물이라 하겠다. 용봉향로는 6~7세기 유물로 보는데, 여기에 나타난 현악기는 악기 형태가 독특한 모양이다. 전반적인 악기 구조상 양이두가 없는 듯 하므로 양이두가 있는 현악기와는 또 다른 형태의 금이 존재했음을 짐작케 하였다. 이 현악기를 ‘거문고’ 혹은 ‘쟁’으로 해석했지만, 이 악기의 형태와 구조 및 연주자의 위치 등을 비교해 본 결과, 거문고 연주 자세에 비교하기보다 오히려 신라토우의 현악기 연주 자세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문헌 기록에서 ‘거문고’는 고구려의 현악기이며, 쟁은 중국 사가들이 백제의 현악기를 중국의 표기 방식으로 ‘쟁’이라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국내문헌 기록에 의거하여 필자는 1차적으로 금으로 해석하였고 ‘백제금’이라는 견해를 제안해 본다. 마지막으로 673년의 명문이 있는 계유명석상은 백제 유민에 의해 제작된 까닭에 백제 유물로 인식되므로 이 유물의 악기 역시 백제 악기로 설명하였다. 악기의 연주 자세나 구조적 측면에서, 고구려 거문고 영향을 받은 듯 보이기 때문에 일단 백제금으로 해석하고, 그 영향력을 인정하는 쪽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현악기 금은 적어도 기원전 1세기 전후부터 재래의 산물이었으며,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 갔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