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삼국의 고분미술과 중국미술
Ⅲ. 삼국시대 불교미술과 중국미술-불상을 중심으로
Ⅳ. 결론
요약
고구려 고분미술은 일찍이 낙랑 등 선진 중국문화를 받아들였고 4세기 중엽이후 불교 공전과 함께 새로운 문화요소가 유입, 이후에도 빠른 속도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며 6세기 후반 고구려 고분벽화는 동아시아 문화선상에서 중국과 대등한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아울러 백제와 신라에게 고분벽화의 회화기술을 전파하는 선진문화 수출국가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게 된다.
백제는 고분미술에서 중국 남조 양과의 교섭으로 다양한 문물을 직수이하는 등 적극적 중국문화를 수용하는 반면 불교미술은 고구려와 마찬가지 6세기 이전의 불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신라는 고분미술에서 금관, 유리 등 실크로드 등을 통해 외래문물이 수입되었다. 삼국 중 가장 불교 전래가 늦은 신라는 6세기 중엽 이후 고분미술이 쇠퇴하고 왕실의 적극적 불교진흥정책으로 불상의 신라화를 가장 단기간에 이룩하였다. 이는 불상의 초기 수용기를 거친 고구려, 백제의 영향이 크다. 이후 중국과의 중요해상로인 당항만을 차지하며 중국과 직교역을 하게되어 북제, 수 등의 불상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고신라 말에는 고구려,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불상을 수용 조성하였다.
고분미술과 불교미술을 종합하여 그 수용시기와 정착과정이 서로 다른 것은 고분미술이 가지는 보수성과 불교도상의 경우 정치적 입장과 달리 국경의 개념 없이 통교할 수 있었던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권력 표상 역할을 담당한 고분미술은 중국 문물 수용에 있어 불교미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받아들임을 알 수 있다. 불교미술의 경우 전통양식의 잔존, 중국 역시 불교미술 수입국이라는 점, 일정 의궤에 따라야 하는 종교의 존상이라는 점 등으로 수용 속도와 지역을 명확히 분류하기 어렵다. 삼국은 불교미술에 있어 중국미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취사선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수용 속도가 빨랐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