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글
2. 한성백제시대의 집자리 분포
3. 한성백제시대의 집자리 특성
4. 한성백제시대의 각 지역 집자리 유적들과의 관계
5. 맺는 글
요약
풍납토성과 토성내 백제 왕경 유적의 연대는 풍납토성과 토성 내에서 발견된 유물의 방사성탄소측정연대 결과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2세기까지로 밝혀졌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을 사실로써 입증한 중요한 動因이다. 풍납토성 내에서 백제 초기의 많은 집자리[주거지]들이 발견․발굴되어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백제 초기의 주거 생활 양식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성백제시대 백제인들의 주거생활을 살피고 아울러 한성백제의 영역권인 서울 근교를 비롯하여 경기․강원 일원의 집자리 유적을 一瞥하면서 백제 초기의 주거 양상을 추측해 보았다. 다만 이번 기회에 충청 지방의 백제 초기 주거생활 유적을 밝히는 일은 온조왕이 아산 湯井城을 쌓고 牙山原에서 5일 동안 수렵하였다고 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일과 함께 잠시 뒤로 미루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서울 암사동에 신석기시대인들의 집터가 남아 있는데 이것을 움집형태로 재현해 놓았다. 지금은 10여 채 정도만 남아 있지만 발굴 초기에는 수백 채가 있었다. 씨족사회였으니까 집 한 채에 7~10명이 살았다면 적어도 700~1천명 가량이 살았을 것이다. 한강 하류에 있는 이곳이 본래 廣州平野이다. 이 지역에 살던 신석기인들이 6천~2천년 전까지 4천년 이상을 농사․수렵․어로 활동을 하면서 살았다. 이 사람들이 없어진 게 아니다. 이들의 후손들이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를 지나 훗날 百濟를 건국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최근 밝혀지기 시작한 풍납토성 내부의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여 초기 한성백제 이전의 기원전 2세기 경의 이른바 풍납동식 무문토기가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1997년 풍납토성 안에서 발굴된 環濠 시설도 온조왕이 하남에 정도하기 이전의 취락시설로 추정되고 있어 일찍이 한강 유역의 광주평원에 인구가 집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정도한 초기 한성백제시대의 백제 왕경의 주민들의 생활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서울 왕경유적을 중심으로 한강 유역의 경기․강원지역의 주거 생활유적을 고찰한 결과, 대체로 기원 전후부터 기원 2~3세기 경의 생활환경은 한강 하류의 백제 왕경유적이나 그 부근의 초기 한성백제시대의 생활환경과 대체로 공통점들이 밝혀지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