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유교문화의 양상
1) 博士制度
2) 天地 제사 ; 郊祀의 변용
3. 유교문화의 성립 과정
4. 맺음말
요약
伯濟國이 자리 잡고 있던 馬韓 지역은 중국 세력과의 접촉 및 교류를 통해 몇 차례의 유교문화의 波動을 맞는다. 前漢代에 韓이 중국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위씨조선이 방해했다는 것은 이미 그 전부터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과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고조선 왕실이 교체되면서 準王집단이 남하하여 마한에 정착한 것이 삼한에 유교문화가 침투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후 위씨조선이 멸망하고 한군현이 설치되며 이를 매개로 하여 유교문화가 수용되었다. 後漢代인 2세기 후반 韓, 濊가 강성해지면서 한 차례 한군현 민들의 유입이 있었고, 313~314년에 걸쳐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다시 백제로 들어오면서, 중국 왕조와의 직접 교섭이 가능해지고 유교문화의 수준도 높아진다. 한성기의 박사제도, 좌평제, 16관등제 등은 이러한 영향 아래서 성립했다고 보인다. 그리고 시조묘․천지 제사도 정비되고, 도교 제사도 일부 수용된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 요소의 수용은 뒤이은 웅진기의 문화 양상을 이해하는데도 유의해야 할 점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백제의 유교문화와 관련하여,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건국 설화에서 신화적 요소가 약한 이유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온조왕대에 東明廟를 설립하고 제사했다고 한다. 이는 부여계의 동명신화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고구려의 국동지혈 제사나 신라의 신궁제사와 달리 형식은 유교적 묘제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백제를 건국한 부여계 집단이 고구려나 伯濟國이북에 자리 잡고 있던 小國의 국가 성립의 경험을 이미 거쳤기 때문이다. 이미 天孫意識같은 신화적 관념이 국가 성립의 이념적 배경이 되는 단계는 지났고, 건국 주체세력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백제의 건국 세력이 남하해 오기 이전부터 마한 사회는 초보적이나마 중국과의 접촉을 통해 유교문화를 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는데 있어서 고구려나 신라처럼 신화적 이념이 그렇게 효용성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백제 왕실에서 天孫意識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이후에도 유교․불교․도교 등의 외래 사상에 개방적인 태도를 낳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