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삼국 항쟁에 있어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대외교섭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십분 활용하였다. 중국의 선진 문화문물인 율령․한자․유교․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다음 이를 개성 있는 자기 문화로 만들었고, 다시 이웃 신라나, 가야, 그리고 일본열도에까지 전파시켜 동아시아 문화 전파에 중요한 교량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였다. 나아가 중국 남조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일종의 동아시아 문화벨트를 구축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 남조가 북조와의 정치적 대결로 인해 자기 전개력을 잃게 되자 백제가 율령, 한자, 유교, 불교를 기본 요소로 하는 동아시아문화를 한반도 남부지역과 일본열도에까지 확산시켜 동아시아문화의 꾸준한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다.
반면 백제가 한반도 정세의 여하에 따라 대외교섭의 통로가 막히게 되었을 때 지배층간에 심한 내홍에 빠져들었고 국가 멸망까지 초래한 것이다. 웅진 초기의 백제의 정정이 그러했고, 의자왕 말기의 대외 정세 판단 착오가 백제 멸망으로 귀착되는 사례가 찾아진다. 백제의 활발한 대외교섭은 국가 발전의 역동성을 주어 한반도 세력관계에서 고구려에 맞서는 중심축으로 위치할 수 있었다. 아울러 자신의 문화의 특수성을 자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아시아 세계 문화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백제는 이러한 열린 마음으로 외래문화를 개방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세련된 동아시아 국제문화로 승화시켜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세련되고 온화한 성격의 문화로 키워나갔다. 여기서 백제 문화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