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중국의 3년상
3. 무령왕과 무령왕비의 3년상
4. 성왕의 3년상과 위덕왕의 즉위
5. 맺음말
요약
중국의 3년상의 기간은 선진 문헌에 25개월로 되어있지만 한나라의 정현에 의해 주장된 27개월의 3년상이 남북조 이래 자리를 잡아왔다. 무령왕과 무령왕비의 3년상은 중국 정현의 설에 따른 27개월 설로 알려져 왔지만 실은 28개월이었다. 무령왕 부부의 28개월은 백제의 고유한 상장례인 빈장을 27개월 설과 조화시킨 것이었다.
중국의 27개월상은 13개월째에 소상을 치르고 25개월째에 대상을 치르고 27개월째에 담제를 치르는 순서로 진행된다. 그런데 백제에는 빈장의 마지막에 치르는 ‘등관대묘’라는 묻는 절차가 남아있기 때문에 담제 이후의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령왕과 무령왕비의 상장례는 27개월째에 대상을 치르고 28개월째에 ‘등관대묘’ 순서로 진행되었다. 백제는 중국의 27개월 3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백제 나름의 28개월상인 3년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성왕의 3년상을 전하는 자료가 없어서 대신 3년상을 주관했을 아들 위덕왕의 행적을 추적해보았다. 『일본서기』에는 위덕왕의 즉위를 성왕이 전사한 27개월 뒤인 557년 3월 1일이라 적고 있다. 이 기간을 계산해보면 성왕의 상장례가 27개월 3년상으로 치러진 것을 알 수 있다. 무령왕의 28개월 빈장에서 27개월 빈장으로 1개월 단축된 것은 담제를 치른 달에 ‘등관대묘’의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다. 이는 성왕대 말 활약한 육후 등에 의해 예제가 완비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서기』에 성왕이 죽은 3년 뒤에 위덕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 것은 성왕의 3년상 동안 자신을 낮춘 것에 대한 반영이다. 위덕왕은 출가를 통해 부왕의 명복을 빌고 효를 다 하였다. 위덕왕은 불교를 포함하여 유교의 상장례 규범인 3년상을 준수함으로써 자신의 위축된 정치적 입지를 보완하려 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