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족 계통의 백제 건국세력은 한강 하류지역으로 남하, 정착한 뒤 북쪽으로 인접한 낙랑군 및 3세기 초 그 자매군으로 신설된 대방군과의 교섭을 통해 일찍부터 중국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4세기 초 兩郡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된 뒤로는 이 지역과 연고가 깊은 다수의 漢人 망명자들을 받아들여 여러 분야에서 활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는 건국한 이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일이 없었는데,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를 갖게 되었다”는 내용의 고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신원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이 고흥은 어쩌면 대방군 지역에서 국경을 넘어 백제로 망명해 온 사람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또한 4~5세기 교체기에 일본에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여 그곳 태자의 스승이 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 소유 창고의 출납업무를 맡았다고 하는 박사 왕인도 어쩌면 낙랑․대방군의 유민으로 백제에 귀화한 사람으로 볼 여지가 많습니다.
백제는 근초고왕 말년 경에 중국의 동진과 수교한 이래 남조의 귀족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 문화의 보편성과 국제성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부여 능산리의 절터, 혹은 왕흥사지라든가 익산 미륵사지 등에서 출토된 각양각색의 미술사 자료는 이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데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들 자료를 통해서 백제인들이 외래 문화에 대해 일정한 선택과 적지 않은 수식을 가하여 백제 고유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독자적인 양식의 것으로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풍요한 마한지역을 배경으로 하여 무문토기시대 이래 철기 사용이 일상화된 단계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토착문화가 배양되어 온 사실에 想到하게 됩니다. 요컨대 백제사 연구의 새로운 진전을 위해서는 영세한 문헌 및 물질자료를 갖고 전체적인 연관을 드러낼 수 있는 문화사적 감각이 절실히 요망된다고 하겠습니다. (필자 맺는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