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먼저 백제가 신성하게 여긴 새와 나무가 무엇인가를 검토해보고, 이를 금동관의 전면 및 후면에 부착한 장식과 연결시켜 이에 내포된 상징성과 사상을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이를 오행사상과 연관하여 살펴보고, 이러한 장식의 사상적 원류를 부여적 전통과 삼한의 소도 전통과 연관시켜 살펴 본 후 백제 관제의 변화를 총괄하였다.
백제는 한성기에는 금동관, 웅진 사비기에는 천으로 만든 관에 금제와 은제관식을 부착하였다. 금동관의 경우 부착된 핵심적인 장식은 鳥翼形과 樹枝形이다. 이는 백제의 새 숭배 및 수목 숭배 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조익형과 수지형이 어떤 새와 나무를 형상화하였으며 그 배경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며, 다음으로 금제나 은제장식이 보여주는 사상적 배경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의 사상이나 문화의 흐름과 연동성을 갖는다. 먼저 백제가 신성하게 여긴 새에 대해서는, 『제왕운기』, 『삼국유사』등의 기록을 통해 매가 백제에서 왕실의 상징으로 관념되었고 외교관계에서 방물로도 이용되었으며 놀이문화의 하나로서 매 사냥은 귀족과 민가에서 널리 애용되었다는 관점에서 필자는 帽冠에 붙은 조형 장식은 매를 형상화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백제에서 신성시한 수목은 왕궁에 심은 나무나 고고학자료를 통해 추정해 볼 때 槐木으로 보았다. 사비도읍기에 출토된 은제관식의 기본모양은 중앙의 줄기와 이 줄기에 좌우 대칭하여 붙은 가지와 가지 끝의 꽃봉오리로 구성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수지형 은화관식의 계통으로 보았고, 줄기와 가지의 수를 1개, 3개, 5개의 음수로 하였다는 것에서 오행사상의 영향으로 보았다. 이 같은 새 날개 모양과 나뭇가지 모양 장식의 원류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부여적 전통, 둘째는 마한 토착사회의 영향이다. 이는 백제 문화가 부여계 문화와 한계 문화를 융합하여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같은 백제 冠制의 변화 과정은 3단계로 설정해 볼 수 있다. 제Ⅰ기는 5세기 2/4분기까지 금동 帽冠에 鳥形 장식을 붙여 만든 관을 사용한 시기다. 제Ⅱ기는 5세기 3/4분기에서 5세기 말기까지로 帽冠과 帶冠이 붙어 있고 樹枝形 立飾이 부착된 관을 사용한 시기이다. 제Ⅲ기는 6세기 이후 백제 말기까지로 금동관은 없어지고 천으로 만든 冠帽를 만든 후 金花飾이나 銀花飾으로 장식한 관을 사용한 시기이다. 이러한 변화는 웅진천도에 따른 백제문화의 전반적인 성격 변화와도 관련된다. 웅진도읍기 이후의 관제는 중국의 관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여기에 전통적 관식을 붙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전통문화와 새로이 받아들인 문화를 복합시킨 산물인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