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보이는 백제 관련 기사는 고구려나 신라에 대한 기사에 비해 분량이 적어 더 이상의 새로운 사료의 발견이나 금석문의 발견 없는 상태에서 적긴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이 백제사의 기본골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사기에 나타난 백제의 제의, 전렵, 순무, 열병, 습사 등에 대한 기록도 중시되어야할 것이다.
백제의 제의에 대한 기록은 제천사지가 타이국에 비하여 특별히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시조묘 기사에서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고구려, 신라가 건국자를 시조로 모신 것과는 다름을 발견했다. 제의에 대한 기사는 시조묘, 천제사지, 기우 등 삼종 불과하고 기사의 수도 많지 않다.
시조묘에는 건국자의 부모가 모셔진 이유가 백제건국에 관여한 서로 다른 정치집단의 공통적 유대의식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여러 집단세력의 유대관계를 결속하려는 제의로서 존재한 것이 제천사지이며 기우는 매우 단편적인 사료이지만 3세기, 5세기, 7세기라는 시간적 추이와 사상계의 변화상이 거의 일치함을 보여주는 기사다.
전렵과 순무에 대한 기사는 순무가 고대의 정치사상에서 갖는 기본적 의미가 매우 다양하며 이를 통해 정복지, 복속지에 대한 조공을 확인하였고 천도지의 점정이나 새로운 정복대상지의 선정이 순무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경우 많은 군사가 동원 되었다. 순무와 함께 혹은 군사훈련으로서의 전렵에 있어 백제는 주로 사슴이 사냥의 대상물이었고 騎射방법이 이루어졌다.
열병과 습사의 기록은 군사적 목적이 강한 의식으로 대외관계에서 항상 전쟁의 위협이 있던 시기 나타난다. 열병 기사가 고구려에 비해 백제, 신라에 나타나는 사실은 주목되지만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습사에 있어서는 백제가 가장 전형적인 기사를 보인다. 왕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사회의 일종의 무예교육으로 신라에 화랑제도가 있다면 백제는 사대를 건축하고 도성에서 습사하는 것이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