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미륵신앙사는 그 자료가 극히 한정되어 있어 신라의 미륵신앙과의 비교를 통해 미륵신앙의 윤곽을 살필 수 있다. 신라와 백제 미륵신앙의 상이점은 불교수용자층의 홍포이다. 신라는 수도인 경주 이외에도 조령루트, 죽령루트, 동해 낙산사 중심의 지역까지 사원이 세워지나 백제는 태안반도 제외하면 사원은 공주, 부여, 익산의 수도 혹은 수도에 준하는 도시에 한정되어 있다. 이는 백제불교의 수용자가 중앙귀족이며 민중까지 미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원효에 의해 대표되어지는 민중불교의 성립은 백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효는 민중에게 불의 자비를 설하였다고 하나 백제의 불교는 국도중심이며 귀족 중심이다. 신라에서는 귀족과 더불어 민중도 불교신봉자층을 구성하고 있으며 화랑-반가상-미륵신앙은 그 전형이라 살 수 있다.
다음은 중국불교계에 대한 자력이다. 신라에서 최초로 학문승이 양에 건너간 549년 이후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경까지의 약 120년간 12명의 학문승이 입당하였으나 백제는 중국에 유학한 승은 2명을 헤아릴 정도이다. 신라는 연속적으로 당에 건너가며 귀국한 이후 신라 불교계에서 지도적 역할을 다하는데 반해 백제입당승의 도항은 산발적이며 귀국 후에는 산림수도자로서 시종하고 있다.
백제의 미륵신앙은 민중층에까지 확대하는 기반을 갖지 못하고 그리하여 민족적 에너지의 결집 계기가 되지 못했다. 같은 시기 한반도의 이웃한 두 나라의 미륵신앙으 그 내용과 수용자층에 있어서 달랐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