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반도-중국 및 남해경유의 중국-인도간 해상교통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이른바 바닷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길을 통해 왕래하던 나라의 상선에 편승하여 구법승이나 외래승들도 왕래를 했으며, 겸익 또한 마찬가지였다.
2. 겸익이 율전을 구한 배경에는 백제의 불교교단의 존재가 먼저 상정된다. 백제는 불교교단의 팽창과 함께 율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불완전한 오부율이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율을 구하기 위해 많은 승려들이 서역으로 구법을 떠났다고 생각되며, 겸익 또는 예외는 아니었다.
3. 겸익의 구법은 무령왕~성왕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시기 백제는 국가의 부흥운동이 최절정기에 있었고, 중국 여러 나라들로부터 신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불교의 본격적인 도입도 이시기부터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겸익은 국가가 파견한 유학승의 성격이 짙다.
4. 겸익의 행적을 전하는 ?미륵불광사사적?의 내용은 백제의 국내외 사정을 고려하는 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시기에 인도불교가 해로를 거쳐 직접 전해진 것은 백제불교의 전환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