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불교 수용 문제에 관한 것으로 기존의 일본학자의 연구성과를 검토하여 백제사 실제에 맞는 불교 수용 연대를 제시하고자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침류왕대 기사에 의심을 품은 말송보화는 삼국사기 외에 이설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高句麗보다 뒤지기 겨우 12년만에 百濟에 들어왔다는 것,百濟와 日本과의 사이에 170여년의 간격이 있는 것이 납득이 안간다는 것이다. 末松保和는 잘못된 선입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결론도 잘못된 것이 되고 말았다. 비록 観勒의 말이라고 전해지는 새 사료를 제시하기는 하였지만, 그 해석도 자연히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田村圓澄은 末松保和의 說에 영향을 받아 考古學的인 중거를 요구하는 등 몇 가지 보충적인 이유를 들어 枕流王代의 佛敎 수용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씨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만일 씨가 百濟의 미술 혹은 고고학적 발굴성과 등에 좀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러한 그릇된 결론은 이끌어내지 않았을 것이 다. 그러나 그도 또한 末松保和와 마찬가지 선입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결론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그가 百濟의 佛敎 수용을 中國으로부터의 ‘下賜’ 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선택의 자유가 없이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에 이르면, 우리를 半世紀 이전의 학문적 암흑기로 되돌아가게 하는 듯한 느낌마저 금할 수가 없다.
日本의 末松保和․田村圓澄 두 학자의 百濟 佛敎 수용 연대에 관한 新說은, 日本의 입장에서 百濟를 본 것이므로 그 출발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日本의 입장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선입견은 아무런 하자가 없는 『三國史記』의 枕流王代 佛敎受容 기사를 부정하는 데로 이끌어가고 말았다. 그러나『日本書紀』에 인용된 観勒의 말에 대한 해석이나 考古學的인 중거의 유무나 등의 문제가 모두 양씨의 주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위에서 설명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