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양식행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불구 중의 하나인 幡에 관해 그 기원인 인도부터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번은 대체로 염직품이라는 재질의 취약성으로 현재 남아있는 유품이 다른 미술품에 비해 대단히 적고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잔결이 대부분이어서 그 체계적 고찰이 어렵다. 인도에서 기원한 번은 중앙아시아로 이르러 마치 제비꼬리를 닮은 제비꼬리형번이 형성되었고 그 제비꼬리형번은 중국에 유입되어 당대에 이르면서 지금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번의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번은 우리나라, 일본에 유입되어졌고 그 과정에 있어서 부분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그 기본형은 중국의 것을 따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연구에 있어 중국의 경우는 둔황에서 출토된 상당량의 번이 있고 일본에도 법륭사 혹은 정창원에 다수의 번이 있어 고찰이 용이하였지만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이전 것이 한 점도 없기 때문에 고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 오사카의 예복사에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번의 잔편이 남아있어 주목되었는데 이 번의 잔편은 유리 사이에 끼워져 보관되어 있고 그 외에 ‘신라국헌상지번’이라는 묵서명이 있다. 이 번의 연주문양과 귀면의 모습, 침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초기로 추정된다. 번에 귀면 예는 중국,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예에 속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귀면번이 있다는 점 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당간지주의 수나 직조 혹은 수를 놓는 기술이 예로부터 발달했다는 점, 여러 문헌 등으로 미루어 과거 우리나라에 많은 수의 번이 있었을 것이 짐작된다. 그러나 현존예가 없어 중국, 일본과 비교 검토한 결과 통일신라 전역에 걸쳐 유행되었을 번은 전형적인 당번을 기본으로 하며 번수를 유소로 대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번은 불교신도들이 가내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은 천조각을 가지고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쉽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불서나 불상에 비해 더 많이 제작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번은 우리나라의 염직공예사에서 뿐 아니라 불교미술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