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道敎的文化複合
Ⅱ. 百濟의 神仙·仙鄕思想
Ⅲ. 新羅의 神仙思想과 花郞
Ⅳ. 高句麗의 도교적 문화
Ⅴ. 고구려 末年의 도교와 抑佛정책
Ⅵ. 맺는말
요약
삼국시대 도교적 문화복합은 신선도가 그 주류였다. 고구려에서 도교가 국가정책으로 권장됐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신선사상이나 신선도의 전통적인 테두리를 벗어난 것 같지 않다. 寶藏王때 唐에서 보내온 道士들은 국내의 有名山川을 돌아다니면서 鎭壓하고, 半月城으로 되어 있는 平壤城을 加築해서 滿月城으로 만들고 ‘千年寶藏堵’니 하는 識語를 만들어 퍼뜨렸다. 이것은 고구려에 道士나 도교 宗團이 아예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백제에서도 “僧尼寺塔이 심히 많고, 道士는 없다”는 《周書》·《北史》·《隋書》 기사가 있다. 신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신선사상 내지 仙道는 신라의 화랑에서 보는 것처럼 불교나 유교적인 문화와 공존해 있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신선사상은 불교와 공존하고 있다. 또 불교가 유교와 섞여 있는 예도 있다. 유명한 德興里고분의 墓誌는 墓主인 鎭이 “釋迦文佛弟子”라는 말로 시작해서 “周公이 相地하고 孔子가 擇日하며 武王이 選時하여 훌륭하게 葬送했다.”고 말하고 있다. 崔致遠이 화랑도를 말하면서 儒佛仙의 공존을 말한 것은 아마도 삼국시대 문화의 공통된 현상으로 생각된다.
신선사상 내지 仙道는 유교나 불교적 교양을 지닌 상류층의 문화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신선사상은 道家的逸民이나 淸談의 氣風을 이어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功過格이나 司命신앙에 보이는 것처럼 윤리적인 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신선술은 근본적으로 시간적인 여가나 경제적인 富가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문화이다. 특히 仙藥중의 仙藥으로 치는 金丹은 돈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秘藥이다. 무엇보다도 신선사상이 지니는 신비주의적 성격 때문에 인간적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仙命’을 타고 난 사람만이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상반된 주장을 하게 된다. 신선사상은 삼국시대 왕권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이용될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이 있었다. 언급한 것처럼 고구려에서는 시조 東明王이, 그리고 신라에서는 시조 朴赫居世가 昇仙했다고 주장했다. 王即佛불교와 같은 현상이다. 신라에서는 또한 화랑이 살아있는 신선으로 주장되었다. 백제에서는 ‘동쪽三神山’이 바로 백제에 있다고 해서 仙家사상의 전통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 모두 막스 베버의 이른바 “대중의 종교적 갈망에 응해서 나타난 종교”로서의 도교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종교적 기능은 이미 巫俗이나 토속적村落祭와 같은 체계로 해결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