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蘇塗를 마한사회에 관습화된 농경의례로서 사회풍속사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는데, 소도의 성립시기를 기원전 3~2세기경 마한 소국의 형성과정에서 성행한 종교의례였다는 점이다. 邑落單位社會는 신분과 계층이 미분화된 평등한 사회관계였기에 정치적 권력이 발달하지 않아 무력적인 방법이 아닌 宗敎的 結束力으로 社會的 結合을 강화시켜 간 것이다. 국읍세력들에 의해서 거행된 제천의식으로서 소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역할과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國家的 社會統合力이요, 다른 하나는 農業生産力의 增大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통합은 소국단위의 인구가 기하급수적 증가로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그에 따른 생업활동이 요구되어져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불가피한 현실이며 가장 현실적인 당면과제였을 것이다. 제천행사는 국읍의 지배세력에게는 사회적 통합을 위한 통치수단을 제공하였고, 피지배계층에게는 부의 축적과 풍요생산을 성취시켜 주는 이상적인 신앙관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러한 농경의례는 國中大會方式의 祭天儀式으로 거행되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풍요기원을 위한 제천의식은 마한 54소국들의 국가형성을 촉진시켜 사회분화를 가속화하여 혈연공동체적인 읍락사회의 해체를 가져왔으며 지연공동체적 성격의 소국사회로 발달해 갔던 것이다. 그 시기는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후기로 전환되는 기원전 3세기경으로, 이 시기에 제정을 관장하는 天君의 신분과 역할을 상징할 수 있은 청동의기의 제작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청동의기는 신성권력의 출현과 농경의례가 성행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제정일치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요녕지방의 청동기문화를 수용한 馬韓의 國邑勢力들은 기원전 3~2세기경에 경제적 부를 토대로 한반도 남부지방에 銅鈴類儀器의 독특한 청동기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소도는 철기문화가 전래하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마한소국의 형성과정에서 성립된 제천의식이었는데, 마한영역내에서 靑銅儀器가 소멸되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제정분리가 진행되면서 소도의 기능도 약화되거나 소멸되어 갔던 것이다. 아울러 주수들의 정치력이 신장되면서 상대적으로 천군의 권한도 소멸되고 제사체계의 변화에 따라 소도는 민간신앙으로 전락하여 갔던 것으로 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