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서는 온조왕대부터 술수자인 日者가 등장하여 백제가 국력을 신장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는 활약을 하고 있다. 이는 백제가 초기부터 낙랑을 통하여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백제에서는 국가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술수의 담당자는 박사제도나 日官部로 편입되어간 것 같다. 관료화된 술수담당자들은 국왕을 통해 중국에 식점, 역림과 같은 술수를 보내줄 것을 요구할 수 있었고, 술수의 담당자들은 식점, 역림과 같은 술수를 중국에 보내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술수는 혼례와 상장예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혼인을 행할 때에 혼인의 길흉을 점치거나 택일에 사용되었고, 상장예에서는 택일을 해서 장례를 치렀는데 길일은 물론 길월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의 예에서 보면 왕릉을 조성하는데 풍수지리도 참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일본에 술수를 전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