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죽막동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제사유적이다. 죽막동이 위치하는 邊山半島와 蝟島는 서해안의 북상하는 항로의 길목에 해당되지만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지점이었다. 죽막동유적처럼 장기간 계획적으로 제사가 이루어진 祭場 이외에 鵠島처럼 연안 島嶼에는 각종 해난을 당하여 실행된 제사관련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죽막동유적에서 이루어진 제사행위를 몇 단계로 나누어 볼 때, 초기단계인 3~4세기 제사의 특징은 토기를 위주로 한 소박한 양상을 띠고 있다. 제사의 주체는 아직 강력한 집권력을 갖추지 못한 재지세력이었을 것이다. 3세기 후반은 馬韓이 여러 「國」이 西晉과 교섭하던 시기이다. 서울 夢村土城과 洪城 神衿城에서 발견된 西晉制 鐵文陶器, 益山 胎峰寺址출토 西晉鏡 등은 모두 3세기 후반 무렵, 中西部지역의 馬韓諸「國」 西晉과 通交한 흔적이다. 아직 馬韓 전체를 아우른 강력한 교섭주체는 대두되지 않았으며 諸「國」은 圈域별로 몇 개의 단위로 나뉘어서 西晉과 통교하였을 것이다. 그 중 일부가 죽막동 인근에서 출항하거나 인근해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행한 제사의 흔적으로 이해된다. 죽막동유적의 중심연대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서 유물의 양도 많고 특히 철기들은 대개 이 시기에 해당된다. 가야계 토기가 증가하는 현상이 보이며 철제 무기류와 마구류는 大加耶계통일 가능성이 높다. 加羅國은 고령 대가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遣使路는 河東이나 金海에서 출항하여 남해안을 西行한 후 서해안을 北上하는 방식을 취하였을 것이다. 그럴 경우 죽막동 인근해안을 통과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아가 대가야의 南齊行은 백제의 도움 내지 묵인 아래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마저 있다. 이러한 정황은 백제영역인 죽막동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출토되는 현상과 부합하고 있다. 중국으로 향하던 대가야 사신단은 죽막동 祭場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시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가야의 金屬器와 大甕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백제영역인 죽막동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祭器나 祭祀具에 백제만이 아니라 대가야와 왜의 것이 포함되어 있는 상황이 이해된다. 죽막동유적은 중국을 향한 백제, 대가야, 倭의 국제교류의 한 현장인 셈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