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불상의 원류에 대해 중국 남조와의 관계속에서 검토하였다.
백제와 중국 남조는 중국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교섭이 이루어졌다. 즉, 4세기 후반(384)부터 오랜 동안의 중국 남조와의 교류관계가 6세기 말(589) 남조의 진나라가 망한 뒤에는 수나라와의 교섭이 이루어졌다. 7세기 초반(618) 당나라가 일어나면서부터는 당나라와의 관계가 성립되었던 것이니 백제 불상의 조성 양식도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상해박물관 소장 釋慧影造釋迦牟尼佛漆金石佛(조성연대;546)과 石造釋迦如來三尊佛像을 살펴보면서 현존 백제불상 중 군수리금동보살입상, 금동보살입상, 군수리석조여래좌상, 서산마애삼존불상의 양식 수법을 비교․고찰한 결과 백제 불상의 원류가 중국 남조이며 특히 양나라의 불상 양식이 전수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데 漆金石像 외의 또 하나의 삼존석불은 절대연대가 없다. 그러나 남조에서 조성된 것만은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성연대를 420~589년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석상은 모든 양식수법으로 보아 조성시기를 6세기 중엽 이후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6세기 후반의 수대 불상들과는 전혀 다른 相好와 각부 양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백제시대의 불상에 대하여 조성연대를 6세기, 7세기, 혹은 6~7세기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연 6세기에서도 중반인지 후반인지, 7세기라고 하면서도 그것이 초반인지 중반인지, 6~7세기라 하면 막연하게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초반까지인지, 6세기말부터 7세기초까지인지, 과연 어느 시기인지를 알 수가 없도록 표기해 놓았다. 모든 도록과 설명서에서, 각기 발표 논문과 저서 등에서도 이와 같은 연대 추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 추정은 중국 불상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조사와 연구가 진행된다면, 6세기 후반, 말기, 7세기에서도 7세기 초기, 전반, 중반 등의 연대 추정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