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管山城 戰鬪과 聖王의 戰死
Ⅲ. 威德王의 追福佛事와 陵山里 寺址
Ⅳ. 夢殿觀音의 聖王遺像說 檢討
Ⅴ. 맺는 말
요약
백제의 성왕은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했다. 태자 여창은 비명에 전사한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출가수도하기를 원했지만, 제신의 만류로 출가를 포기하고 즉위했는데, 곧 위덕왕이다. 위덕왕은 부왕의 추복을 위해서 특별히 100명을 출가시켜 여러 공덕을 닦도록 했다. 백제 조정에서는 지금의 부여 능산리에 성왕의 능을 조성하고 바로 그 옆에 공덕분사를 창건하여 위덕왕 13년경에 완성한 것 같다. 이 사실은 최근 능산리사지의 발굴조사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성왕의 추복을 위한 여러 불사는 왕실에서 주도했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을 것이다. 이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 및 사리감으로도 이러한 상황은 짐작된다.
성왕의 추복을 기원하기 위한 추복 불사는 새롭게 창건한 이 능사에 불상을 조성해 모시고, 여러 幡蓋로 도량을 장엄하고, 혹은 향을 사르고, 禮懺의 의식을 행하면서 공덕을 닦았을 것이다. 그리고 망자의 추복을 위해서 불상을 조성하던 사례에 유의하면, 위덕왕이 부왕을 戀慕渴仰하여 만든 구세관음상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기록은 주목할 만 하다. 사천왕사 금당에 봉안했던 구세관음상과 법륭사 몽전에 秘佛로 전해오는 구세관음상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19세기말까지도 법륭사의 승려들은 몽전의 구세관음상이 추고천황 때 조선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했고, 지금도 이 절에는 몽전관음이 성덕태자의 願佛이라고 전해진다. 따라서 몽전관음은 위덕왕이 부왕을 연모갈앙하여 만든 성왕의 遺像이라는 《聖譽抄》의 기록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덕왕이 100명을 출가시켜 부왕의 추복을 기원하는 공덕을 닦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능산리사지의 발굴로 확인된 셈이다. 그리고 위덕왕이 부왕을 연모해서 구세관음상을 만들었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몽전관음상을 만들었다는 제작지를 백제와 관련지어 논의할 수 있는 미술사적인 근거 또한 적지 않다. 일찍이 이 상을 조선의 작품이라고 했던 Fenollosa와 柳宗悅의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의 일본 미술사학계에도 이 상은 백제 양식을 비교적 꾸밈없이 전개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