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을 ‘하사’의 대상물로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율령의 제정이나, 태학․화랑도 같은 교육기관의 설립이나, 국사의 편찬이나, 또 대외적인 영토확장이 모두 책봉체제하에서의 종주국의 ‘하사’에 의한 것이 아닌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불교의 수용도 ‘하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이 스스로 필요해서 수용한 것이었다. 특히 국왕 중심의 귀족세력이 필요해서 수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불교를 수용함에 있어서 이차돈의 순교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진통을 겪는 것은 불교가 전해지는 당시에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만큼 왕권이 발달하지 못한 후진국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田村圓澄이 신라에서는 종주국의 ‘하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진통을 겪었다고 풀이한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판단인 것이다. 이 점은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538년(혹은 552년)에 백제로부터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은 ‘하사’가 아닌 ‘증여’였기 때문에 흠명천황은 傍觀․中立의 입장을 취할 수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증여’였기 때문이 아니라 왕권이 강력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증여’의 이론으로 일본의 불교 수용을 이해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