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의 휘인 효순의 의미는 성왕계의 불교활동을 고려할 때 유교보다도 오히려 불교적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비시대 성왕계가 강조한 효는 모두 불교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왕계의 결집을 통한 왕권강화라는 성왕계의 정치적 움직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법왕의 즉위배경을 오합사의 창건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위덕왕대 혜왕이 차지하고 있던 정치적 위치는 매우 높았던 것이다. 위덕왕의 왕권은 혜왕의 협력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에 성왕계의 계속적인 결합을 위해서 혜왕의 왕위계승이 필요하였으며, 이어 그를 차지하는 상당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를 대신하여 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왕계는 위덕왕대 왕실원찰인 능산리 사원을 창건한 이후 새로운 호국사찰의 창건을 필요로 하였다. 특히 3산 5악에다가 호국사찰을 두어 성왕이 사비천도와 함께 추진하고자 했던 국토재편계획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법왕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호국사찰의 창건은 오합사나 금산사 등의 사원창건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법왕의 사원창건은 지방으로의 불교확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법왕의 호국사찰 창건은 백제불교가 국가 불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불교의 경우 계율종뿐만 아니라 법화신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어 주목된다. 법화신앙이 백제에서 본격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시기는 아무래도 의덕왕대 이후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비천도 이후 성왕계의 왕권강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법왕대 추진된 왕흥사의 창건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법왕의 단명배경을 불교사상의 확산을 둘러싼 왕권과 귀족세력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와 같은 해석은 무엇보다도 법왕과 무왕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파악하지 않은 점에 크게 기인한다. 무왕이 왕흥사를 완공시켰다는 사실은 법왕이 추구했던 정치적 목표를 오히려 달성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왕대의 정치적 변화과정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