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에 관한 한, 濟紀의 초기 기사는 시간적으로 매우 혼돈되어 있다. 반면, 내용에서는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관련 기사의 성격상 믿을 만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단 한성시대의 북방관련 지명기사를 모두 추출해 낸 다음, 그것을 나름대로 위치 비정해 보았다. 그 결과, 백제의 최북방 영역관련 지명은 예성강선을 넘어서 황해도 중․북부지역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浿河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백제사상 북방으로 최대의 판도를 구가한 이는 근초고왕이다. 그렇다면 위의 지명비정 결과는 일단 근초고왕대의 판도와 동일시될 수 있다. 근초고왕 26년(371) 당시 백제는 황해도의 중․남․동부지역 대부분을 영역화하였을 것이다. 대동강 남부 수계에 속할 패하가 북경의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또 같은 해에 백제의 평양성 공격이 감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욱이 왕이 재위 27년에 동진으로부터 받은 ‘영낙랑태수’는 그 당시의 책봉이 아무리 형식적인 것이었다 해도, 전후의 授爵과정으로 보아 백제의 영토가 낙랑지역과 전혀 무관하여서는 칭호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또한 이른바 요서진출설의 최대 논점이자 중국측 대동방 책봉책에 즐겨 이용된 ‘낙랑’이 근초고왕과 밀접히 연관된다는 사실 자체가 근초고왕대 대동강유역 진출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濟紀 온조왕 13년조의 영역 확정 기사는 후대 사실의 소급이 비교적 분명한 대목이다. 따라서 이를 시기 조정할 필요가 있는데, 필자는 근초고왕대의 사실일 개연성이 가장 크다고 보았다. 北界의 指標를 兩紀 모두 패하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데다가, 영역 확정이야말로 ‘서기’와 같은 공식 기록류를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효과를 거둘 수 없는 정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