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비시기의 법화신앙에 대해 살펴보았다. 백제의 법화신앙은 현광의 예를 통해 볼 때, 꼭 왕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혜현도 수덕사에 주석한 이후 번잡함으로 피해 달나산으로 가고 있는 것에서도 백제 법화신왕이 꼭 왕권과 연결되어 생각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법화신앙의 성격은 백제의 지방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해 주었다고 본다. 이제까지 본고에서 언급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현광은 남악 혜사로부터 법화안락행의를 은밀히 전수받고 수행하여 법화삼매를 증득하게 된다. 그것은 혜사의 법화안락행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혜사의 법화안락행의는 자신이 수행 중에 겪었던 북조불교와 관련되어 있다. 혜사는 북조불교에서 말세를 모았고, 이러한 말세사상이 법화안락행의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당시 백제는 북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어가고 있다. 위덕왕은 북조와의 외교관계를 성립하면서 빈번한 접촉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백제의 북조와의 관계는 현광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까지 현광의 귀국은 법화삼매의 증득과 가까운 시기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현광의 제자인 혜민의 전기를 보면, 귀국연대는 위덕왕 37년 이후로 보인다. 그리고 백제가 북조와의 관계가 빈번해지면서 현광의 귀국 이후의 교화활동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확산되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화활동의 과정에서 혜현과의 접촉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혜현은 처음부터 수덕사에 주석하면서 『법화경』을 송독하고 있다. 그런데 혜현은 번잡함을 피하여 강남의 달나산으로 옮기고 있다. 현광의 수행이 지계와 선정에 있는 만큼, 개인적인 계율의 강조와 수행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혜현의 달나산 이주도 지명법사와의 주도권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수덕사는 백제에 있어 중국의 선진 불교문명이 유입되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이러한 관련성은 예산의 사면석불을 비롯하여 태안의 마애불, 서산의 마애불 조성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본다. 여기서 서산의 마애불이 『법화경』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은 주목을 끈다. 그렇다면 이 당시 이 지역에도 법화신앙이 성행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