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년에 북중국의 前秦에서 승 순도를 보내자 고구려에서는 성문사라는 절을 지어 살게 하였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고구려가 처음 불교에 접한 기록이다. 승려를 보낸 계기도 그렇고, ‘성문사’라는 이름도 관공서에 흔히 붙는 말이므로 고구려의 초전불교는 외교적이고 시책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고승전 등에는 승 담시가 4세기말에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였다고 하였다. 담시는 東晋의 승려이므로 고구려에 남중국의 불교가 들어온 것을 말해주는 사료로 볼 수는 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로 볼 때 4세기 중반에는 이미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왔다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으로부터 격의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벽화 내용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미륵상생신앙을 가졌고, 절을 지을 때 성대한 의식을 치른 것을 알 수 있다.
백제는 384년에 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가 오자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듬해에 10명의 승려가 배출된 것을 보면 이전에 불교적 기반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전남 영광군의 불갑사가 바로 마라난타가 들린 절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근거는 조선시대 사료에 의거한 것이고, 고고학적 자료라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신라는 눌지왕때 고구려 묵호자가 처음 불교를 전하였다고 하는데 고구려와의 관계로 보아 대략 타당하다. ‘묵호자’는 ‘검은 이국승’이라는 뜻으로 별명이니 아마도 서역승이었던 것 같다. 이밖에도 초전승으로 ‘아도’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전도승의 대명사와도 같아서 특정 승려를 가리킨다고 보기 어려우며 후대에 신비화되었다. 신라 사람들이 처음 아도를 보았을 때 ‘아도삼마’라 하였다. ‘삼마’는 곧 스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있던 말이었으니 ‘샤만’을 일컫는 신라말로 보인다.
골품제사회인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신분적 차이를 더욱 정당화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과거보다는 현재의 삶을 중시여겨 현생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업을 받으니, 선행을 하여 좋은 과보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승려 중에는 평민이나 노비도 많이 있으니 신분제에 별로 제약을 받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불교는 신라의 신분제사회에 일종의 완충제 역할을 하였다는 설이 최근에 제기되었다.
가야불교는 더욱 전설 속에 가리워져 있다. 현재 가장 이른 가야 사료도 대개는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이므로 가야불교를 문자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특히 가야의 왕후가 인도 Ayodhya에서 왔다는 전설은 이 지명이 과거 또는 현재에 실재한 지명이 아니라는 데서 허구이다. 하지만 남해 등 해로를 거쳐 한국에 불교가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