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問題의 提起
II. 高句麗의 南進과 羅濟兩國의 對應
1. 羅濟兩國의 和好背景
2. 新羅의 百濟連和와 對高句麗 强硬策
III. 新羅의 兩面 實利外交와 漢江流域 確保
1. 智證王系의 王位繼承과 對外關係의 變化
2. 法興·眞興王代의 對外關係와 漢江流域 確保
IV. 맺음말
요약
433년 맺은 나제간의 화호는 우선 고구려 장수왕대에 단행된 평양천도와 이를 계기로 추진된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에 기인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대고구려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었으며, 신라의 경우 고구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요성에서 양국 간의 이해가 합치되어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550년을 계기로 하여 신라와 고구려는 적대관계로 돌변하게 되었고, 5세기 후반 소지왕대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나제양국은 일방의 힘만으로 고구려의 침입을 막지 못할 경우 구원요청에 의해 공동 대응하는 관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신라는 백제와 군사동맹 뿐 아니라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대고구려 강경책을 강화해 나갔다. 신라는 이러한 백제와의 연화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저지함으로써 고구려와 나제연합 간의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고, 국가 존립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460년대 후반경 신라는 영내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구려군을 소백산맥 이북으로 구축하고 서북변에 축성사업을 벌려 신라의 영역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한편 6세기 초 신라는 내물왕계의 방계였던 지증왕의 즉위로 기존의 친백제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려제 대결구도에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한 채 대내적 체제정비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어 법흥왕대에는 양과의 교섭을 계기로 백제와 수교를 맺음으로써 외교노선을 친고구려에서 친백제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진흥왕대에도 친백제 노선을 계속 유지하면서 백제와 공동으로 대응하였는데, 551년 북진은 나제양국이 이루어 낸 값진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554년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는 대중관계에서 고구려나 백제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가야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삼국항쟁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이와 같이 6세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구도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양면 외교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대내적인 체제정비와 영역확대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해 나갔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