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대의 불교와 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문제를 검토하였다. 무왕대에 활동한 고승으로는 혜현이 있는데 그는 삼론을 강의하거나 『법화경』을 독송하는 일로 업을 삼았다고 한다. 무왕 3년(602)에 일본으로 간 관륵은 삼론에 조예가 깊었는데, 일본 최초의 僧正이 되기도 했다. 이로써 백제 무왕대의 불교계에 天台 및 三論學에 대한 이해를 가진 고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왕은 매번 배를 타고 왕흥사로 가서 行香할 정도로 불교를 신앙했다. 익산의 제석사도 무왕 때 건립되었을 것이다. 무왕 40년 겨울 11월에 화재로 제석사가 불타자 국왕은 탑의 초석에 보관되어 있던 불사리 등을 봉안할 또 다른 사찰을 세우도록 했는데, 아마도 당시에 건립된 사찰의 탑이 왕궁리의 오층석탑일 것이다. 위덕왕 때에 건립된 능산리사지의 탑과 왕흥사의 탑속에는 불사리가 봉안되었음을 최근의 발굴 성과로 확인되고 있다. 이는 백제 사리신앙의 구체적 사례라고 하겠다. 仁壽 원년(601)에 해동의 삼국은 수나라에 불사리를 요청했었는데, 백제의 경우 이 해는 무왕 2년에 해당한다. 무왕을 비롯한 궁중 사람들이 사리를 깊이 신앙한 사례가 있다. 무왕 40년 제삭사가 불타고 불사리를 봉안한 수정병에 사리가 보이지 않자 국왕은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고 다시 열어보자 불사리 6과가 고스란히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불사리의 불가사의한 영험을 직접 목격한 무왕과 궁인들의 사리에 대한 신앙은 더욱 깊어졌던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미륵사 서탑의 사리봉안기는 백제 무왕 40년(639) 정월 29일 미륵사 서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성한 불사리를 수호하는 주체는 왕실이었다. 왕흥사․제석사․미륵사 등 세 사찰의 사리 봉안 주체는 모두 백제 왕실이었다. 왕흥사․제석사․미륵사 등 세 사찰의 사리 봉안 주체는 모두 백제 왕실이었다. 사리의 신성성에 의탁해서 왕실의 존엄을 고양시키려는 정치적 상징으로 이용한 사례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미륵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이는 왕비이고, 그 왕비는 선화공주였다. 그러나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미륵사 창건의 발원자가 무왕의 왕비인 사택왕후라고 했다. 사리봉안기가 서탑에서 나왔음에 주목하여, 사택왕후는 書院의 창건만을 발원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백제왕후가 조립했다는 가람은 미륵사 전체를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