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序言
II. 5世紀後半 百濟王統譜와 昆支
III. 昆支의 渡倭事情
IV. 昆支와 倭王權
V. 東城王의 卽位와 百濟․倭國關係의 新局面
VI. 結語
요약
455년 蓋鹵王의 즉위와 더불어 개시된 高句麗의 기습공격에 의해, 이후 양국은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빠진다. 국내지배체제의 강화와 대외전쟁의 수행이라는 이중과제를 업은 蓋鹵王은 권력의 서열화를 정해 集權體制를 일층 강화하고 王弟 昆支를 倭國에 파견해서 군사적 협력체제를 꾀했다. 한편 昆支의 對倭派遣의 이면에는 蓋鹵王이 1人에 의한 권력집중을 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를 권력의 중추부로부터 배제시킬 목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귀국이 허락되지 않았던 昆支는 百濟系 渡來人과의 族的紐帶關係를 매개로 해서 결속, 倭王權에의 선진문물을 공급하는 유착관계를 통해서 倭國內에서 그의 지위를 높여 간다. 그런데 漢城의 함락과 蓋鹵王의 피살이라는 본국의 비상사태에 직면하여 文周王의 요청에 의해 귀국, 內臣佐平에 임명되어 왕권을 보좌하게 된다. 그러나 昆支의 왕권에의 복귀는 왕권을 전횡하고 있던 解氏一派의 견제를 받아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살해되어 버린다. 百濟國內의 解仇의 반란, 三斤王의 早死 등 왕도함락 이후 불과 4년을 거치는 동안 정국은 일층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解仇의 亂을 진압하고 실권을 장악한 振施政權은 百濟王으로서 昆支의 子인 倭國 出生의 東城王을 선택한다. 王都의 함락 후의 국가적 비상사태 하에서 百濟의 對外政策에 군사외교가 최우선정책으로 놓여졌음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倭王權側에서는 對中國朝貢外交 478년을 최후로 해서 중단된 이후, 南朝의 선진문물의 직수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적 권위를 배경으로 해서 구축해 온 국내지배체제를 동요시켰고 全國連合政權의 首長으로서의 倭王의 권위도 실추되어 갔다. 이때 倭王權의 최대의 정치적 과제는 權力集中을 통해서 倭王의 권위의 회복과 국내지배체제의 재구축이었다. 이와 같은 당면과제를 실현시키기 위해 경제기반의 확보, 즉 농업 생산력의 증대가 필수불가결하였다. 그런데 倭王權에 있어서 광대한 경지의 개발에 필요한 生産技術과 人力의 도입의 중심은 百濟였기 때문에 자연히 對百濟外交策은 적극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