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왕 2년(600)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사리함기에 의해 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하여 577년 立刹한 것으로 밝혀졌다. 입찰이 찰주[탑]를 세웠다는 의미인지 사찰[절]을 세웠다는 의미인지 둘다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지만 왕흥사란 이름의 절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왕흥사는 특히 입지가 특별한데, 위덕왕은 아들의 추복을 위해 지은 절을 항상 바라볼 수 있도록 백마강 북안에 立刹하였다. 이 절의 이름을 자기사(子基寺)로 추정해 보았다.
법왕의 금살생과 왕흥사 창건은 아버지 혜왕의 장례기간의 애도 분위기 및 추복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법화경』의 전륜성왕-대통불-석가모니로 이어지는 석가불국토의 완성을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법왕은 30인의 승려를 度僧시켜 寺格을 높이면서 예전에 입찰했던 곳을 중개창하고 국왕과 법왕[부처]의 일치라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하여 절이름을 왕흥사라 하였다. 30인의 도승은 수계갈마 및 출죄갈마와 관련되어 있었다. 무왕은 석가모니를 닮고자했던 법왕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가 도솔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634년(무왕35) 왕흥사를 완성하고 이를 미륵사라 부른 적이 있었다. 이는 석가에서 미륵에서 넘어가는 수기사상과도 관련이 있었다.
한편 왕흥사를 사비에 세웠다는 『삼국유사』 법왕금살조의 기록은 왕흥사가 익산의 미륵사로 혼동될 것을 염려하여 특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익산 미륵사가 왕흥사로 불린 적이 있다는 기록은 익산의 미륵사를 왕흥사의 미륵사와 혼동하여 잘못 파악한 것이었다. 결국 왕흥사는 위덕왕의 입찰, 법왕의 중개창, 무왕의 낙성 등 여러 단계를 거친 절로 백제에 석가불국토를 실현하기 위해 세운 절이었고 이후 왕흥사의 석가불국토는 익산의 미륵불국토로 전개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