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은 동진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선진문물을 수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불교수용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 시기에 이미 도가와 유가가 중심사상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는 한수 이남에서 열병할 때 軍旗가 황색을 띠고 있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근초고왕대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불교가 수용되지 않은 것은 도가·유가사상이 그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 시기 동진의 황제들도 불교에 우호적이기는 하였지만, 봉불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침류왕대의 불교수용은 지배층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근구수왕대부터 약화되기 시작한 왕권은 새로운 사상을 찾았고, 당시 백제 내부에 침투해 있던 불교는 그 대안으로 모색되었다. 그리하여 침류왕대 불교를 수용하자마자 사찰을 창건하고 10명을 도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침류왕이 불교를 통하여 왕권을 고양하려던 의도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마라난타의 성격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신이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신이성을 곧 왕권과 연결시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왕실의 불교 수용이 귀족세력의 전적인 동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침류왕과 진사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불교가 백제사회에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귀족세력들이 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왕실의 불교수용과 백제사회의 정착노력이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서 찾아진다. 즉, 선문문화를 백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기 이전에 이를 이식시키고자 함으로써 문화적인 이질성을 노출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아신왕은 즉위하면서 불교를 널리 퍼뜨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신왕의 불교홍포 노력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번번이 실패함으로써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개로왕대 불교는 도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도림은 고구려의 승려로 환속하여 백제로 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개로왕대에 불교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개로왕 재위 18년에 북위로 보내고 있는 표문에 "대대로 신령하신 교화를 받았으나"란 대목이 있는 것은 당시 백제의 불교가 남조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