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중엽 백제세력의 가야정벌과 그 배경, 영향 등을 살펴보았다. 백제세력의 가야정벌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日本書紀』에만 나타나지만 사료검토 결과 백제가 주체가 된 일종의 군사행동이 있었음은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단 이 군사행동이란 상대를 무력으로 분쇄하고 정복하는 형태가 아니라 무력시위를 바탕으로 백제가 바라는 외교관계를 강요하는 형태였다고 생각된다. 후대의 사료에 이 시기의 정벌이 화친의 형태였다고 기록된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백제가 가야를 정벌했다고는 하지만 그 관리형태는 직접 지배가 아니라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속력을 가지는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백제가 가야에 진출하게 된 이면에는 交易圈을 장악하려는 加耶-新羅-倭와의 미묘한 力關係가 그 배경으로 작용한 듯하다. 『三國史記』기록에 나타나는 加耶-新羅間의 충돌은 바로 이 交易圈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日本書紀』에 신라가 加耶-倭 사이의 교류을 방해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는 데에서도 뒷받침된다. 浦上八國의 亂을 계기로 신라가 가야를 제압하게 되자 왜는 타격을 받았다. 3-4세기의 양사서에 나타나는 新羅-倭關係記事가 이를 뒷받침한다. 백제의 낙동강 방면 진출은 이 세력관계의 재편에 계기가 된 듯하다. 새로이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백제가 신라 때문에 교역에 타격을 받아 불만을 가지고 있는 왜를 이용하여 신라세력 축출에 나섰기 때문이다. 가야세력도 백제와 왜의 움직임에 큰 반발을 보이지는 않은 듯하다. 백제-왜 연합세력에 저항할 만한 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신라세력에 눌려있던 상황에서는 백제세력의 진출로 더 많은 손해를 볼 것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이런 정도로도 交易圈을 장악하고 유사시 百濟-加耶-倭라는 집단안보체제를 형성할 수 있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제가 加耶征伐에 나선 해에 고구려가 백제의 북변을 공격하고 이에 371년 백제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도 백제세력의 팽창을 경계한 고구려의 견제와 이에 대한 반격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가야를 복속시킨 백제는 왜까지 포함하여 백제-가야-왜의 동맹체제를 성립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