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6세기 전반 가야의 대외관계와 관산성전투의 영향
III. 대가야의 멸망과정
IV. 맺음말
요약
加耶-百濟-新羅 三國의 力關係를 재검토함으로써 加耶의 消滅過程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의 百濟-加耶關係나 韓半島南部의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기존의 설대로 加耶가 新羅의 위협 때문에 百濟에 의존하게 되어 자발적인 반종속상태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後期加耶聯盟의 성립 자체가 百濟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 百濟와의 분쟁에서 패배한 加耶가 新羅와 접근하려 했던 점, 이러한 시도 때문에 생긴 加耶諸國 자체의 분열과 自救勢力이 百濟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던 점, 그리고 이후 加耶諸國이 百濟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던 것은 거의 부용화의 단계로 볼 수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安羅와 ‘日本府’가 高句麗와 밀통하여 百濟를 치려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는 加耶의 百濟 종속이 어떠한 형태이건 ‘자발적인’것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加耶는 新羅와 百濟사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다가 百濟의 부용국으로 전락했던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당시 百濟에의 종속이 加耶의 이익을 위한 자발적인 조치라기 보다는 百濟의 세력에 의하여 부용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면 管山城戰鬪 이후 加耶地域이 급속히 新羅에 흡수하는 과정 역시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래서 管山城戰鬪를 재검토해 본 결과 기존의 설과는 달리 百濟나 加耶가 그다지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과 大加耶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新羅에게 저항을 한 흔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연관시켜 볼 때 加耶諸國이 新羅에 흡수된 것은 新羅에게 무력으로 정복되었다고만 보기보다 百濟에게서 벗어나려는 방편으로 新羅의 지원에 의존하려 하다가 오히려 新羅에 역이용당하여 정복된 것이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新羅의 팽창이라는 것도 자체내 힘의 결집이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주변정세의 이용이라는 측면도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