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교육제도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사료의 편린들을 볼 때, 역사가들은 백제에도 학교교육제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믿어왔다.
학교와 관련된 사실은 바로 백제의 박사제도이다. 박사는 오경박사와 전업박사로 나뉘며 박사인재는 귀화한 한인을 이용하거나 중국에서 초빙해오다가 자국인을 임명하고 왜국에 파견까지 하게 되었다. 이처럼 왕인박사 등이 국외로 나아가 학술성격을 담당한 사실은 국내에 이미 학교제도가 실재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백제의 박사제도는 근초고왕 말년에 오경박사 제도를 설치하고 이를 박사로 지칭했으나 실은 6세기 이후부터 양조의 영향으로 오경박사로 칭하기 시작하였고 성왕시대 의, 역 등의 제전업박사를 증치하기에 이르렀다.
백제는 역사 등의 교재를 구입하고 왕인이 왜에 부임할 때, 천자문과 논어를 휴대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외의 경전 등이 6~7세기에 이미 백제사회에 광범히 유입되었다.
또한 국내외정세를 따져보았을 때, 고이왕대에는 6좌평제, 16관등제, 복색 등을 제정하였으나 이는 초보적인 요인이 완성된 것이며 근초고왕대 고구려 격파 후 국도를 옮기거나 동진에 조공하거나 왜에 칠지도를 진상한 것 등을 토대로 근초고왕대에 학교의 창립은 당연지사이다. 노자의 사상을 백제의 상류계층이 받아들였다면 훨씬 이전에 유교의 통치원리가 수입되었을 것이다.
학교의 창립 시기는 근초고왕 28년 진조공 이후가 가장 높으며 고구려가 태학을 설치한 것에 자극을 받은 백제도 이 때 학교를 창립하고 태학이라 칭하였다.
백제 학교는 한성기 시작 이후로 6세기 전반 무령왕과 성왕대에 걸쳐 단계적으로 발전하였다. 무령왕은 남천이후 중흥대업 전개 시, 양의 제도를 모방해 대학을 확충하고 경전박사를 설치하여 경교학을 분리시켰고 성왕은 사비천도 후 적극적으로 국가건설에 착수한 결과 중앙집권체제가 거의 완비되고 학교교육 역시 종래의 태학교육을 신설된 22부사 사종부에 예속시키고 의학교육은 약부, 역학 등은 일관부에 예속시켰다. 이는 백제멸망까지 줄곧 불변하고 지속되었고 이후 일본 고대학제의 창건에 영향을 주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