碑岩寺癸酉銘全氏三尊佛碑像과 瑞光庵癸酉銘三尊佛碑像은 그 銘文內容에 있어 「彌次乃全氏」와 「彌次乃眞牟氏」가 同一姓氏의 單字姓表記임을 알게 되었다. 또 「百濟本紀蓋鹵王」條의 祖彌氏․『日本書紀』「繼體紀」의 姐彌氏 등이 眞牟氏로 改寫하기까지의 同一姓氏의 表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 姐彌氏가 「百濟本紀」에서는 모조리 眞氏로 改作되었으나 다만 文周王과 同送, 熊津으로 南遷한 祖彌桀取만은 原形대로 남아 있다. 이로써 「南齊書」에 나오는 姐瑾이 姐彌氏의 單字表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國難을 물리치고 武功이 뛰어나 冠軍將軍 都漢王으로 除授된 姐瑾은 同年代의 「百濟本紀」에서는 兵官佐平 解仇의 반란을 꺾은 眞老일 것이라는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 天安全氏世譜에 始袓를 十濟功臣이라 하고 그 子를 兵相이라 한 것은 이러한 正史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곧, 文周王과 함께 남하 熊津에서 百濟再建에 主役이 된 祖彌桀取는 溫祚王十濟功臣으로, 解仇叛亂을 平定하고 兵官佐平이 된 眞老는 「百濟多婁王朝爲兵相」으로 表現되어온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百濟本紀」에서 보는 바와 같이 文周王南遷以後에도 眞氏는 王族과 外戚關係를 맺으면서 王姓인 扶余氏와 兩代勢力을 形成해 왔던 것이다. 溫祚王以後 6代 仇首王代에 이르는 250年間은 접어 두고라도 近肖古․近仇首․辰斯王代는 眞淨․眞高追․眞武가 각각 王后親戚․王舅였으며 兵馬大觀을 委任받고 高句麗征伐의 主役이 된 것도 眞氏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百濟前期부터 확고한 기반을 형성하였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癸酉銘碑像이 발견된 지역도 全氏와 관련이 있는 天安․全義一帶라는 것도 만연한 일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熊津南遷後의 이른바 「北部」는 바로 天安一帶가 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