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삼국 및 후삼국시대의 혼인형태를 사료를 통해 검토한 것이다. 특히 배우자가 한명인지 그 이상인지에 초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후삼국시대에 왕실에서는 일부다처를 취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고구려, 백제에 관해서는 왕실 기록만 남아 있지만 신라는 왕실 아닌 귀족이나 일반관료의 혼인에 관한 사료를 볼 때, 이들도 일부다처를 취한 경우가 보인다.
여러 처 사이의 지위관계는 대체로 첫 번째 처와 그 밖의 처의 지위가 비등한 것으로 호칭의 차이가 없고 형제, 서형제 사이의 관계의 등급차가 없고 서자의 몸으로 왕이 되는 사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첫 번째 처 또는 지위가 동등한 복수의 처에 비하여 그 지위가 약간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처이다. 소비, 소후, 후궁 등으로 불리운 처가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출신성분이 천한 처로서 이상의 처와 비교시 그 지위가 현격히 떨어진다.
‘庶’자가 들어가는 용어는 서자, 서제, 서형 3종류로 그 사용시대를 보면 백제는 비류왕부터 사용하였지만 신라는 통일신라기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용어의 출현시기는 묘제 변화시기와 상응한다.
여기서 주목할 저은 ‘서’자가 붙는 사람의 지위가 그렇지 않은 사람과 거의 동등하다는 것인데 중국에서 도입한 서자, 서형, 서제의 용어는 중국에서 사용한 의미와 달랐음을 뜻한다. 이는 일부일처 사상이 엄격한 조선 후기 사회에서 확연히 구별되지만 지위가 거의 동등한 여러 명의 처가 존재한 고대사회와 고려사회에서는 누구를 서자로 호칭할 것인지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내용도 중국과 다른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