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一. 新羅史通說 비판
二. 百濟略史, 百濟史講話
三. 朝鮮史槪說의 三國, 新羅王國 비판
四. 高句麗 五族五部考
五. 百濟 五方五部考 비판
六. 新羅 骨品考 비판
맺는말
요약
금서룡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사를 왜곡하여 편찬하려고 조직한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그 행정사무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3편의 편수사무를 담당하였고 그는 동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대학 외에서 한국사왜곡을 일반에게도 널리 보급하였다. 그는 7개의 논저를 통해 한국사를 왜곡하였고 그의 논저 성격은 다음과 같다.
그는 먼저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한국사는 삼국시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다시 송, 요, 금나라에 복속되었으나 외침과 당쟁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드디어 한국사는 끝났다는 대전제하에서 자기연구를 구체화해갔다. 어떤 때는 신라인은 중국인이고 한국인은 일본에 이주한 일본인이며 또 신라왕에는 일본인도 있었고 백제왕의 왕의 계승이나 천도도 일본에 의해 좌우된 바 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역점을 두어 왜곡한 것은 위서인 일본서기 중심으로 한국사 연구를 하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기년과 세계는 전설, 허구이므로 믿을 수 없고 임나뿐 아니라 백제, 신라도 일본에 귀속된 식민지라는 대목이다. 한국고대사를 가장 방대한 양으로 왜곡, 말살한 금서룡의 왜곡이 황당무계하다면 그를 이어받은 말송보화의 왜곡은 지능적인 왜곡이다.
금서룡의 한국사왜곡이 노출된 몇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신라본기의 신라건국년을 조작으로 몰 때, 고구려 본기 기사가 권위있는 기사라고 말하고 정작 고구려역사나 고구려5부 등을 고찰할 때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은 모두 조작전설기사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면서도 28대 진덕왕까지 제왕이 성골이라는 기록을 인정하니 스스로 허위주장임을 인정하기도 한다.
또 백제가 300년간 일본에 복종하여 한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백제가 일본에 반항하였다하는 등 스스로 자기주장의 허구성을 폭로하기도 한다. 삼국사기는 조작되었으니 일본서기에 의해 백제사 등 한국고대사를 연구해야 한다면서 일본서기 흠명기의 백제관계기사의 불교전래기 외는 거의 전부 백제본기를 취록한 것이니 결국 백제본기에 의해 백제를 연구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등 자신이 만든 전제와 모순되기도 한다. 요컨대 금서룡은 학술논문보다 개설사에 역점을 두었고 근대적, 학문적 비판이나 근대적 역사방법에 의한 연구를 한 적이 없고 근거 제시 없이 한국사의 말살하고 왜곡시켰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