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城에 대한 필자의 추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된다. 百濟는 河南慰禮城에서 建國하였다. 물론 河南慰禮城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河南의 大城․王城이라는 의미의 일반명사를 轉化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比流王代 이후 頻出하는 漢城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濟紀 蓋鹵王 21년조와 『日本書紀』雄略紀 20년조에 의하면 漢城은 北城(大城)과 南城(王城)으로 나뉘어진다. 2개의 城으로 이루어진 漢城을 지리적 관점에서 구분한 명칭이 北城과 南城이며, 城의 특성과 기능에 입각하여 구분한 것이 大城과 王城이다. 중국 戰國時代 列强인 趙․薺의 都城, 곧 邯鄲城과 臨淄城이 모두 北城(大城)을 주축으로 하였고, 濟紀의 北城이 『日本書紀』의 大城과 통하며 大城=漢城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백제의 漢城도 北城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한강유역에 현존하는 유적지에 대입하면 北城은 風納里土城, 南城은 夢村土城에 비정된다. 백제가 漢城을 南․北 2城으로 구성한 것은 근초고왕 대였다. 濟紀 近肖古王 26년 조의 ‘移都漢山’은 기사의 일부가 亡失되고 남은 것이다. 亡失된 부분은 아마도 부분적으로 왜곡된 채 溫祚王 13․14년 조로 移置된 듯하다. 4세기 중반 백제의 왕실을 차지한 近肖古系가 溫祚․肖古系의 後孫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것이다. 따라서 ‘移都漢山’의 漢山은 北城(風納里土城)과 南城(夢村土城)의 立地條件으로 보아 近肖古王의 移居地는 南城임이 분명하다. 반면 溫祚王의 初都地, 곧 河南慰禮城은 風納里土城에 비정되어야 한다. 요컨대 백제는 風納里土城에서 건국하여 2세기 가량 중심지로 사용하다가 都城의 범위를 확대하여 南城을 축조한 다음 近肖古王代에 왕을 비롯한 일단의 지배층이 南城으로 移居하였으며, 北城 내의 王宮은 이후 別宮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결국, 4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百濟의 漢城은 北城(大城)을 중심으로 그 남쪽의 南城(王城)까지 포함하는 명칭일 뿐 아니라, 두 城의 주변에 형성된 聚落․農地에 대한 汎稱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