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 의해 대화왜의 강역, 백제에 의한 대화왜의 경영, 백제의 대화왜가 일본으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다.
9세기 초까지도 대화왜이 강역은 기내를 벗어나는 경우도 있긴 하나 대화를 중심으로한 6개국, 기내정도이다. 고구려의 백제 침공이 격심해진 4세기 중엽 이후부터 백제민의 일본 열도 이주가 이어졌겠지만 백제로부터 대규모의 집단이주민이 대화지방에 이주 정착한 것은 5세기 초이며 대화왜의 고대국가는 대체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주시기는 국가로까지는 볼 수 없으나 이주민 가운데 어떤 영도자가 출현하여 그들을 종합하고 영도하여 신천지를 개척하는 중심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대화왜는 백제에 의해 백제에서 파견된 관인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백제와 대화왜 관계는 종주국과 속국의 관계였다. 대화왜의 왕궁의 구조, 대화왜의 왕과 백제 왕자와의 관계, 대화왜가 백제 의해 경영되는 측면 등으로 미루어 대화왜의 왕건은 극히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나당군에 항복하자 백제의 왕족 지배층과 대화왜는 백제 부흥군을 형성하여 3년간 혈투를 벌였으나 이것이 무위로 끝나자 백제의 왕족과 지배층은 몽땅 백제의 관위가 통용되고 백제의 관인이 파견되어 경영하였던 대화왜로 이주하였다.
대화왜로 이주한 백제의 지배층과 대화왜는 합심하여 신라의 공침에 대비하였으며 동시에 백제로부터 전쟁 피난민의 정착 대책을 구성하였다.
신라로부터 침공의 위험도 없어지고 백제로부터 3천명이나 되는 이주민에 대한 대책도 수립되고 나당군과의 피비린내 나는 고전의 악몽도 사라지고 자주 독립적으로 국가를 경영해 나갈만한 전문 지식 지배층을 확보하게 되자 670년 대화왜는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고 왕호를 왕에서 천황으로 바꾸어 새로운 국가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따라 일본이라는 고대국가는 백제관인이 경영하고 백제관위가 사용된 백제의 속령 대화왜에서 나당군의 침공으로 패망한 종주국 백제의 지배층이 건너가 세운 국가인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