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 26년 이전 백제의 정치적 위상은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마한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포착된다. 사회적으로 청동기문화에 기반을 둔 마한은 철기문화단계가 확고해진 당시의 시대적 변화에 위기를 느꼈고 온조집단의 한강유역 정착을 인정해주는 것으로써 위기상황을 극복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온조세력과 마한의 정치적 관계가 맺어졌는데 온조집단은 마한의 제후국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그 관계는 공납적 체계로 맺어졌다.
온조왕대 세력범위는 삼국사기 기록대로 오늘날 경기도 일대를 온조왕13년 거의 포괄하였다. 이것이 백제초기 한강유역 지리적 범위인데 북으로는 예성강, 동으로는 춘천, 서로는 서해안, 남으로는 안성천을 한계로 했다. 그리고 온조왕 26년 이후 남쪽으로 차령산맥을 경계로 그 북쪽 아산만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 범위는 근초고왕대 차령산맥 이남 마한세력 정복 이전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이같은 상황하에 백제초기 지배세력은 한강유역의 농업생산력 향상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사회의 전반적인 생산력이 향상되었고 나아가 사회 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이 변화를 실증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4세기 이후 전개된 대규모 정복전쟁이다. 대표적으로 마한정복전쟁은 이전의 약탈전과 양상이 다르며 본격적 영역회득전쟁이었다. 이는 한강유역에서 축적한 충분한 물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