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은 1948년 제창된 이래 현재까지 국민적 관심하에 오랜 기간에 걸쳐 찬반논쟁을 거듭하며 수정보완되었다.
江上은 기마민족이 부여, 고구려족과 특별한 친연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만으로는 우리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기마민족설 문제는 어디까지나 일본 역사학계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이지만 기마민족설에는 한국사와 직접 관련 되는 대목이 없지는 않다. 진왕 정권이 변한 지역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한·왜연합왕국을 형성했다는 주장은 우리로서도 관심을 갖고 검토해야할 대목이다.
기마민족설에서는 부여족계통의 기마민족이 나한지역으로 이동하여 진왕정권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본시 부여족을 ‘호족’의 개념에 포함시켜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또한 변한이 부여 계통이라는 것도 아직은 미해결의 문제다. 더욱이 진왕의 문제는 역사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하여 그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진왕이 4세기 초 일본열도로 건너갈 때까지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변한지역을 지배했다고 보는 江上의 주장은 실제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자의적 해석이다. 한편 江上은 일찍부터 왜인들이 구야지방에 진출하여 이를 점유하였다고 주장하나 왜라는 종족이 남한지역의 어디에도 거주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江上이 진왕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헌자료를 무리하게 해석한데서 나온 착오에 불과하다.
기마민족설에서 말하는 한·왜연합왕국은 바로 그릇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江上은 일본으로 건너간 진왕이 왜왕인 동시에 한왕의 성격을 아울러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송서 왜국전의 일부 기록을 근거로 하여 왜왕이 가야지방을 직접 영유한 외에도 진왕가의 본가 입장에서 분가인 백제에 대해서 잠재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입장에서 그가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기본적으로 고구려와 왜국과의 대결구조로 파악하고 있음은 말할나위도 없다. 그러나 대화정권이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확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또 본가, 분가의 발상은 지난날 일선동조론의 재판에 불과할 따름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