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百濟前期 지배세력들은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하여 농업생산력 증대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서해안 지역의 해상세력을 흡수․통합하면서 교역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百濟前期 지배세력들이 그들의 물질적 부를 보다 많이 확보하고자 했던 관심과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생산된 풍부한 물적 자원은 백제사회 내부의 전반적인 생산력 수준을 높였고, 나아가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통치체제의 정비도 뒤따랐을 것이다. 백제가 통치체제를 정비한 것은 어느 한 시대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기록상으로도 溫祚王代로부터 近肖古王代에 걸쳐서 그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백제 東明廟의 제사기록을 통해서 국가성립 요건의 하나인 시조신앙의 모습을 파악해 보았다. 고대사회에서 시조묘 제도가 존재했다는 것은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는 증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국가성립의 기본적 요건의 하나인 행정편제와 관련된 기록을 분석하였다. 여기서는 단순한 지역구분만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따른 사민기록도 포함하여 보았다. 그리하여, 백제가 국가체제를 발전시켜가는 과정 속에서 관리의 관장업무가 연속적으로 분화되어 간 사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이왕 당시에, 후대와 같은 완전한 6좌평제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좌평제의 기본 골격이 갖추어졌다고 해석되었다. 덧붙여, 4세기대인 비류왕대나 근초고왕대에 이르면 백제는 활발한 남방경략을 추진한다. 이는 온조왕대 이후 잔존한 마한세력에 대한 정복이었다. 이 시기에 진행된 백제의 남방 경략은 갑자기 일어났던 것이 아니고, 온조왕대 이후 축적된 농업생산력과 교역을 통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영역쟁탈전의 성격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 점에서 이전 시기 한강 유역에서 축적된 생산력은 충분한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고 본다. 아울러, 백제는 근초고왕대에 이르면 북방의 강국인 고구려와 정면대결을 시작한다. 이는 백제사에서 전쟁의 상대가 고구려로 되었다는 단순한 의미보다는, 본격적인 삼국정립의 시대가 전개된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