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問題의 提起
2. 韓의 帶方郡攻擊記事
1) 曹魏의 대외정책과 交易體系의 변화
2) 帶方郡 기리영전투의 성격
3. 辰王關係記事
1) 『三國志』의 전승과 韓傳
2) 辰王관계기사의 이해
4. 結語
요약
『三國志』 韓傳 對外關係記事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曹魏 正始年間에 일어난 한의 대방군 기리영공격사건은 220년경이래 吳蜀과 한층 치열해졌던 중원쟁패에 필요한 배후지의 안정과 부족한 군수물자의 조달을 위하여 정벌과 교역체계의 재편을 통한 적극적인 대외정책의 시행과정에서 마한의 경기북부지역 토착사회가 이에 불복한 결과였다. 『삼국지』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한이 대방태수를 전사케 하고, 군현은 반격을 가해 ‘滅韓’하였다고 하는 등 매우 격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멸한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이해되어 온 ‘韓那奚等數十國 各率種落降’은 이 전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며 적어도 군현에 항복한 수십국 모두가 한의 소국이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이 전투의 의미를 더욱 높여왔던 전투의 주체문제에 있어서도 목지국 진왕일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백제 고이왕 또한 적극적으로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판본상의 이동으로 소수의견이었던 臣濆沽國이 그 주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백제가 한강유역을 3세기 후반이래 통합해간 데에는 신분고국이 멸망한 뒤의 힘의 공백이, 백제에 의한 통합에 기여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2. 通行本 『삼국지』한전에 의하면 진왕에 관하여 2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마한에는 목지국을 다스리는 진왕이 있는데, 그는 한의 4~5개 소국 신지명을 優呼로서 더하고 그 아래 조위가 제수한 魏率善邑君 등 다수의 魏官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변한사회의 경우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진왕에 속하는데, 그 진왕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고 항상 마한인을 세워 왕을 삼는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전자를 통하여 목지국 진왕은 대외교섭의 측면에서 삼한사회를 이끄는 특이한 기능을 지닌 존재로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주된 견해였다. 반면 후자는 진한에도 마한의 진왕과 명칭이 같은 진왕이 있다고 함으로써, 辰弁韓傳의 진왕기록을 혼란된 기록으로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검토결과 『한원』의 위략은 오탈자가 심할 뿐 아니라 그 내용 또한 원문을 압축변개하였는데 오히려 『삼국지』등의 문장을 보고 추측하여 改文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목지국 진왕의 특수한 기능을 설명한 논거는 매우 취약한 것이라 할 것이다. 진변한전에 기록된 진왕도 목지국 진왕과 동일이며 자연 이에 속한 12국은 弁韓이 아니라 辰韓인 것이다. (필자 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