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예산현과 대흥군의 성립
3. 고려의 남진정책과 예산진
4. 고려 이후의 임존성과 소정방사
5. 맺음말
요약
후삼국 시대 이후의 예산과 임존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신라시대 임성군으로 개명되었던 대흥면 지역은 후삼국기에도 백제의 명칭인 임존성으로 불리웠다. 그것은 백제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지역민들의 의지 때문이었다. 미약하나마 후백제 세력의 영향을 받았던 임존성은 궁예 말년 궁예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왕건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혼란을 틈타 웅주․운주와 같이 후백제로 넘어왔다. 그러자 왕건은 919년 아직 후백제에 들어가지 않은 烏山城에 예산현을 설치하고 유민들은 安集케 함으로써 남진 정책의 한 기지로 활용하려 하였다. 결국 태조 8년(925) 왕건은 임존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임존성을 대흥군으로 개명하였다.
둘째 임존성을 빼앗은 왕건은 태조 10년(927) 운주까지 공격하여 점령하고 웅주를 쳤으나 실패하였다. 이로써 예산현과 대흥군(임존성)은 둘 다 고려와 후백제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게 되었다. 왕건은 태조 11년(928) 탕정성(온양)과 운주 옥산에 성을 쌓고 운주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운주의 일부 군대가 임존성에도 머무르게 되었다. 태조 13년(930)에는 왕건이 고창군(안동) 전투에서 견훤군을 대파하고 천안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남진정책의 총괄기지로 삼았다. 이때 천안 지역의 군대 일부가 예산에 머무르게 되면서 예산진이 탄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후일 대흥군은 운주의 속군이 되고 예산현은 천안부의 속현이 된 배경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태조 17년(934)의 운주 전투나 태조 19년(936)의 일리천(경북 선산)전투에서 일정한 활약을 하였다.
셋째 임존성은 고려 후기 몽고가 침략해 왔을 때 다시 한번 국난 극복의 중심지가 되었다.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온 군민이 합심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한편 고려 인종 이전의 어느 시기에 이 지역의 대잠도에는 소정방의 사당이 건립되어 정치적 구심점이 되었다. 이 지역의 토성 출신으로 고려 인종대부터 영달했던 韓惟忠․韓文俊 가문의 일족이 친중국적인 성향을 가지고 이 사당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세종조에 들어와 호국신아라 명명한 것을 고쳐 신격에서 ‘호국’자를 빼게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다가 세종 이후 임존성 근처의 성황사에서 소장방을 제사하게 되었다. 성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던 것이다. 또 조선 태종대 대흥현으로 강등되었던 이 지역은 숙종 7년(1681) 현종대왕의 태실이 있었던 관계로 군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예산군에 편입되어 지금까지 대흥면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임성군으로서 고산현(예산)을 관할하던 통일신라시대의 입장이 이제는 면으로서 예산군의 통제를 받는 위치로 바뀌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