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유민의 동향
III. 김헌창의 난과 공주
IV. 후삼국기의 공주
V. 맺음말
요약
백제 멸망 후 백제 유민들의 동향과 그에 따른 정치적 사건을 통일신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는 백제를 통합하면서 백제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다. 백제의 귀족들에게 신라의 관등을 수여하여 귀족대우를 하였으며 백제인들이 중시하던 산천을 사전에 편입하여 치제하였다. 그러나 백제인들은 완전히 신라에 동화되지 않았다. 스스로 지역의 공동체 의식을 발양하기 위해 절이나 불상을 세웠고, 백제인의 후예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경덕왕대에 활동하였던 진표는 백제인을 자칭하면서 백제인들에게 미륵신앙을 전파하여 사상적 결집을 도모하고 미래를 꿈꾸게 했다.
둘째 이러한 백제인들이 동향은 사회가 어지럽고 생활이 궁핍해지면서 반신라 감정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이것을 이용한 것이 김헌창이었다. 그는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의 시중직에서 해임당하면서 난을 준비했다. 그는 菁州(晉州)․武珍州(光州)의 도독을 지내기도 했지만 옛 백제의 수도였던 웅천주(공주)의 도독에 재임하고 있던 시절 난을 일으켰다. 그것은 백제 유민들이었던 웅천주인들의 반신라감정을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경덕왕대에 새로 설치된 熊川州停의 군단이 군사적 뒷받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 백제유민들을 이용하려 했기에 실패하였다. 뒤이어 그의 아들 김범문도 고구려부흥을 내세우며 남평양(경기도 양주)에 도읍하려 했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셋째 이러한 백제 유민들의 반신라 감정은 진성여왕대에 견훤이 백제의 부흥을 내걸자 다시 폭발되었다. 그리하여 옛 백제 지역이 대부분 후백제에 가담한 것이다. 그가 全․武․公等州軍事를 자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905년 홍기가 궁예에게 항복하면서 공주는 궁예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후 918년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정변을 일으키자 이곳을 지키고 있던 伊昕巖이 철원을 철수하였다. 이 틈을 타 공주는 백제에 대한 연고의식으로 다시 후백제쪽으로 넘어왔다. 이후 공주는 후백제의 최북단 기지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다가 태조 17년(934) 운주 전투에서 견훤군이 크게 패하고 경상도 지역이 거의 왕건에게 넘어가자 대세를 어찌할 수 없어 고려에 항복하였다. 후백제도 태조 19년(936) 고려에 정복당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제 백제유민으로서의 역할은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