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백제 義慈王에 의한 蘇我蝦夷․入鹿 父子 誅殺 기사
3. 『大化改新』에 관한 기사
4. 맺는말
요약
『일본서기』 崇峻前期 6월 기사와 崇峻元年 기사는 蘇我(馬子)가 백제왕이 파견한 백제사인의 지시에 따라 대화왜 경영에 종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기사이다. 백제사인의 지시에 따라 백제왕의 대화왜 경영에 종사한 소아(蝦夷․入鹿)가 642년부터 백제왕에 반역하여 스스로 대화왜왕의 행사를 하고 대화왜를 경영하였으니 이를 방치할 리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백제 의자왕은 645년 鎌足 등을 파견하여 蝦夷․入鹿을 주살하게 된다. 백제에 의하여 蝦夷․入鹿父子가 주살된 직후 일대 정치 개혁이 단행되었다면 이것은 의당 백제에 의하여 행해졌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여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출계가 모호한 효덕왕이 정치개혁의 소를 공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대화왜는 그러한 소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대화개신의 소는 중국의 여러 고서를 모자이크하여 만든 것에 불과하다.
『일본서기』는 蝦夷부자가 주살된 뒤 그 해를 「대화」원년으로 연호를 개정하고 다음 해인 646년에 「대화개신」의 소를 선포하여 국정을 쇄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대화개신」의 소는 그 선포자라고 말하는 효덕왕의 출계나 소의 내용으로 보아 전부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는 개신의 소에 의하여 국정을 쇄신하고 대화왜가 독립국가임을 나타내려고 의도하고 있었으나, 664년(천지3)에 제정된 관위가 백제인에게만 수여되었고, 663년 백강구 전쟁에 참전한 왜군이 백제왕 풍의 군대였으며, 백제왕 풍이 패전하여 도주하자 왕자인 충승과 충지가 왜군을 거느리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사실 등에 의해서도 독립국인 대화왜의 왕이 선포하였다는 「대화개신」의 소는 허구임이 분명해진다. (필자 맺는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