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동성왕의 국권회복과 사비천도 계획
III. 무령왕의 국제적 지위확보와 사비경영
IV. 성왕의 사비도성 건설과 천도
V. 결언
요약
고구려의 남침에 의하여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백제는 왕권의 불안과 국제적 권위의 실추로 인하여 사상 최대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왕권의 불안으로 왕이 시해되었고, 고구려의 방해로 대중국관계가 단절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동성왕대에 이르면 어느 정도 수습된 듯하다. 왕권의 다소 안정과 중국 남제와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정도로 국권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국권을 회복한 동성왕은 왕도를 정비하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웅진의 협소하기 그지없는 지형으로서는 어려움을 느끼고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도읍의 후보지를 사비로 정하고 이곳의 방비를 위하여 가림성을 축조하려던 중에 천도를 방해하는 백가의 세력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웅진이 협소하여 한 국가의 도읍으로서 적합지 못함은 무령왕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령왕은 아직 상존하고 있는 고구려, 말갈의 위협을 일소하기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비지역을 중요시하여 경영하였다. 무령왕의 이러한 사비지역의 경영은 아마도 천도를 전제로 한 경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존재하고 있는 북경의 고구려, 말갈의 위협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하여 천도는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천도의 준비작업으로서 사비를 경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상당기간 도성을 건설한 이후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성왕은 동성왕과 무령왕대에 이루어진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의 재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사비로 천도를 단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고구려의 남침에 의한 백제의 어려움은 극복되고 새로운 사비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