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化改新에 의해 蘇我씨가 타도되고 개신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개신정권 세력은 反蘇我씨 세력이었다. 蘇我씨의 멸망과 개신정권의 득세와 함께, 翹岐의 소멸 및 豊璋의 재등장이 서로 맞물리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즉 豊璋은 그 정치적 성쇠를 개신정권 즉 反蘇我씨 세력과 함께 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蘇我씨세력정권시절에 翹岐가 형적을 감추고 豊璋이 다시 자취를 드러낸 것은, 蘇我씨와 翹岐세력이, 또 反蘇我씨세력과 豊璋세력이 각각 정치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밀착된 관계였음을 입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사료라고 하겠다. 641년은 전술한 바와 같이 백제정권내부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었다. 翹岐의 渡日은 그러한 갈등과 관계가 깊은데, 渡日이라는 것이 일본의 후원세력을 전제로 한다면 앞의 정황으로 보아 蘇我씨세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反蘇我씨세력 혹은 蘇我씨에 대한 협력세력이 아니었던 豊璋은 도일이후 정권 즉 蘇我씨세력에게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蘇我씨가 타도된 뒤에 改新政權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된다. 굳이 말하자면 개신이후 왜국의 외교 정책전환과 함께 翹岐를 대신하여 豊璋이 주목되어 복권된 것임을 의미한다. 大化改新에 의한 蘇我本宗家의 滅亡과 唐에서 유학한 高向玄理․僧旻등이 改新政權의 주체로서 등장하여, 당분간 親新羅적인 외교노선을 견지하게 된다. 이 같은 改新正權의 새로운 外交政策은 豊璋의 왜국에서의 역할에도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 즉 豊璋․塞城등은 義慈王에 의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倭國에 파견되어 使者에서, 『紀』孝德紀 白雉元년 2월 戊寅條 以下에 보이는 것처럼 穴戶國이 獻上한 白雉 祥瑞로 규정하는데 下問者로서 등장하고 改元儀禮에도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외교정책의 전환에 의한 그의 정치적 역할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豊璋과 翹岐는 別人이고, 이 두 사람은 상반되는 정치세력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