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과 왜국에서는 저마다 일정 시기에 편사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최종적으로 사기와 일본서기로 결실을 맺었다. 그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고구려고 건국신화에서 특히 현저하다.
고려 초기의 광종대 편찬으로 추정되는 『구삼국사』는 삼국의 역사를 하나로 정리하였지만 그 이전 후기신라대에 그와같은 역사서가 있었는가는 불명확하다. 후기신라대에는 성덕왕대에 수사사업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여겨진다. 명확한 증거는 없고 삼국사가 의도되었다는 보증도 없다.
고구려의 『신집』은 『위서』 이하의 중국 사서를 참조해왔다. 『구삼국사』도 역대의 중국 사서를 참고하고 있고 후한서에 의거한 『구삼국사』의 문장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고구려, 신라 말기에 대해서는 『구당서』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구삼국사』에는 그러한 예는 아주 적고 거의 국내사료를 사용하여 기술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에 비해 『사기』는 물론 국내사료를 중심으로 하였지만 종래의 중국사서뿐만 아니라 새롭게 들어온 『신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구』를 많이 활용하였다, 『사기』 편찬 목적은 『신집』 등 『구삼국사』가 몰랐던 국내 사료를 장악하였다는 것과 중국 사서가 새로 들어왔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